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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화성 청명산성 - ◉신라 40대 애장왕(800년809년)

by globetrot 2025. 2.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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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성 청명산성

◉ 애자왕이 즉위한다(8(소리)) 애기왕주1이 왕위에 올랐다. 왕의 이름은 청명(정명), 서성왕(서성왕)의 태자이다. 어머니는 김씨 가쓰라카 부인 註2다. 즉위할 때의 나이가 13세였기 때문에 아쇼 3병부 영주 4언승주 5가 섭정했다. 처음에 전성왕주 6이 죽으면, 德宗註 7이 사봉승 중주 8 겸 御師中丞註 9위단 韋丹註 10을 부절로 해, 개부 의동 三司註 12 刀教太尉註 13 죽음의 소식을 듣고 이에 당으로 돌아갔다. 註1 애기왕 : 신라 제40대왕으로 생몰년은 년, 년까지 재위했고 이름은 김청명이다. 소성왕의 장남으로, 소성왕이 죽기 직전에 굵은 글씨로 비난받고 13세의 젊은 나이로 왕위에 올랐다. 에히메왕이 어렸고 직접 정사를 돌보지 못하고 삼촌 김히승이 섭정을 했다. 형제는 김국명이 누나의 흥덕왕비인 나가와 부인이 있다. 어른이 되어, 삼촌에게 맡긴 정사를 직접 하려고 했던 것으로 보이지만, 이것에 불만을 안은 삼촌에 의해 죽여 버렸다. 그에게 후사는 없었다고 추정된다. 註2 가츠라 부인 : 오아키 김 숙명의 딸로 아이 자오의 어머니다. 본서권 제10신라본기 제10애장왕 6년(806)조에 당으로 대비해 책봉했다. 이때 계화부인을 숙씨라고 했지만 원성왕비인 성목태프의 성을 아버지 이름의 첫 글자 신이라고 적은 것과 마찬가지로 아버지의 숙명의 첫 글자를 성으로 기재한 것이다. 이는 당시 왕실의 근친혼 사실을 당에게 알리고 싶지 않았던 신라가 당에게 잘못된 정보를 알렸기 때문이라고 보고 있다(이병도 번역주 1996 삼국사기를 유문화사 257페이지). 『구당서』권 199상 열전 149상 동이열전 신라전 『신당서』권 220 열전 145 동이열전 신라전 등에서도 마찬가지로 나온다. 한편, 본부 모토키 권 965 외신부 봉책 3봉이 전 21년(805) 3월에는 와씨라고 나오지만, 꽃은 야도의 저주로 여겨진다.

 

註10 단탄:『신당서』 권197 열전122 메이징과에 급제해 지방관과 전중 사무라이 사사의 사인 등을 역임하고, 사봉로 나카가네 미사 중승으로서 신라 소성왕의 본봉사의 임무를 맡았다. 이때 그는 자신에게 할당된 관직을 팔아 얻은 재물로 개인의 활동경비를 조달하던 기존의 관행을 거부하고 필요한 경비를 조정에 청구해 집행했다고 한다. 하지만 신라에 오는 도중 소성왕이 사망했다는 소식을 듣고 본봉서를 들고 돌아갔다. 그 후 다양한 관직을 거쳐 좋은 관리로 이름을 남기고 58세에 사망했다. 註11 俊邕: 신라 제39대 소성왕의 본명이다. 본서권 제10신라본기 제10소성왕 즉위년(799)조의 「소성왕」에 대한 주석 참조. 註12 개부의동3사 : 개부의동 3사는 삼사, 곧 사도사마사공처럼 스스로 관할을 설치하고 속관을 놓는 개부를 할 수 있는 최고 직위를 의미하는 관명으로 후한대부터 사용됐다. 여기에서는 당의 29등급 문산계 중에서 가장 높은 종 1품 관계로 사용됐다(김태민주편 2003 『 譯蔻唐六典上』 신서원 페이지). 註13 검교태위 : 당으로 태위는 삼공의 하나로 정일품이며, 그 지위는 상서도성 위에 있었지만, 증관인지 친왕이 배수되는 예가 많았고, 단지 이름만의 명예직에 가까웠다. 또한 당에서 검교는 범관으로 사용된 것이다. 註14 정저우 : 현재 중국 산동성 정성현과 도평현에 있던 당의 지방행정단위. 수개황 10년(590) 처음으로 운주가 설치되어 당에서 치소 변화가 있다고는 했지만 유지됐다. 註15 돌아왔다: 같은 내용이 『장당서』 권 199상 열전 149상 동이열전 신라전과 『신당서』 권 220 열전 145 동이열전 신라전과 『구당서』 권 13 본기 13 덕종하 정원 정요 5 16년(800) 4월조 『책부 원조』 권 965 외신부 봉신(봉책) 3 정원(사다모토) 16

 

◉왕이 나카히메로 개명한다(8(소리)) 원년(800) 가을 7월에 왕이 이름을 중희로 바꿨다. 註1 중희로 바꿨다 : 아이 자오의 개명 이유는 모른다. 구당서 권 199상 열전 149상동이열전 신라전과 신당서 권 220 열전 145동 이열전 신라전에는 중흥이라 불렸다. ◉숙위학생 출신 양열을 두드리는 현 소수로 임명한다(8(소리)) 원년(800) 8월에 전 입당 숙위 학생(양당숙 위학생) 양열주 1을 두힐현(콩버리 현)주 2 소수주 3으로 임명했다. 이전에 당관종주 4가 봉천으로 이사했을 때, 주 5량량이 난리하게 수행한 공이 있었고, 황제가 오른쪽 추선대부 조 6을 제수하고 돌려주었기 때문에 왕이 그를 발탁하여 썼다. 註1 양열(梁悅): 이 기사에만 나오는 인물이다. 註2 두힐현(豆蘹縣) : 두힐현이라는 지명은 두 곳에서 확인된다. 본서권 제36지 제5지리3 신라무주 분령군조를 보면 분령군의 4개 영현 중 하나인 강원현이 본래 백제의 두현이었지만 경덕왕이 강원현에 고정돼 고려의 두원형. 이 두힐현은 지금의 전라남도 고흥군 두원면에 비정정된다(이병도역주 1996 삼국사기(아래)을유문화사 247쪽). 또 무주 금산군조를 보면 금산군의 3가지 영현 중 하나인 교진현도 백제 두힐현으로 기록돼 고려까지 이 이름을 계속 사용했다고 한다. 여기는 지금의 전라남도 라주시 다면면에 비정의된다(정복복 외 2012『개정증보역역 삼국사기4』한국학중앙연구원 출판부 354페이지). 본서권 제37지 제6지리 4백제무진주조에도 두힐현이 두 번 나온다. 한편 같은 책에서 뒤이어 나오는 총장(總章) 2년(669) 2월 이적(李勣) 죽군성(竹軍城)이고 그곳에 죽군현을 두려고 했는데 죽군현이 원래 두힐이었다는 기록도 있다. (개정 증보)역주 삼국사기 4』한국학 중앙연구원 출판부 4)

 

이 기사의 두힐현이 둘 중 어느 것인지는 모른다. 註3 코모리 : 신라 지방 행정 단위 최하위 현의 장관직. 본서권 제40 잡지 제9직관하 외관조에는 소수와 한자가 다르게 기재되어 있으며, 또한 제수라고도 불렸다는 주석도 있다. 직관지와 달리 본기에는 모두 소수로 나온다. 정원이 85명으로, 망토오나마의 관 등 소지자가 임명되었다고 한다. 다른 현의 장관현령의 정원은 201명으로 관 등이 선사지사단인 사람이 임명되었다. 현령과 소수는 모두 현에 파견된 지방관인데 차이가 무엇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현의 규모나 군사적 중요도에 의해 구분된 것으로 간주하는 견해가 있다(정구복 외 2012『(개정증보)역주삼국사기4』한국학중앙연구원 출판부 593페이지). 註4 도쿠무네: 당의 제12대 황제로, 이름은 이후이며, 재위기간은 년이다. 조조조 제도를 폐지하고 양세법을 시행하는 재정 확충을 도모했지만, 지방 절사의 반란이 이어지자 그들의 자립을 인정해 주었다. 註5 봉천을 거역했을 때 : 선덕왕 4년(783) 10월 경원절도 사요영언이 반란을 일으켜 장안이 점령되면 덕종이 피신한 것을 앞당긴다. 6 우창성대부(우호선대부) : 당태자관부의 관직으로 태자우사의 아래직이다. 당육전에 따르면 정원은 5명으로, 관품은 정5품상이다. 우창 선거부는 왼쪽 장 선거부와 같은 직장을 갖지만 황제의 간의대부에 해당한다. 곧바로 태자를 종시하면서 보좌해, 규간, 카자마하는 것을 맡는다(김태민 주편 2008 『연주당 육전하』신서원 페이지). ◉ 시조 무덤에 가서 무덤을 정비하고 크게 용서된다(8(소리)) 2년(801) 봄 2월에 시조묘 1을 찾아갔다. 태종대왕주2와 문무대왕주3의 양사당을 따로 세우고 시조대왕주4와 왕의 고조부 명조대왕주5 증조부 전 성대왕조(쇼성대왕)주8에서 5묘9를 만들었다.

 

병부령주 10 히코승주 11을 어룡성주 12 사신주 13으로 하고, 잠시 후 상대 등주 14로 했다. 크게 망설였다. 註1 시조묘 : 신라에 있던 사당에서 국가제사 중 하나인 시조에 대한 제사를 올린 곳이다. 자세한 것은 본서권 제1신라본기 제1난카이차 차운 3년 정월조의 「시조 무덤」에 대한 주석 참조. 註2 태종대왕 : 신라 제29대왕으로 재위기간은 년이다. 본서권 제5신라본기 제5태종무열왕 즉위년(654)조의 주석참조. 註3 문무대왕 : 신라 제30대왕으로 재위기간은 년이다. 본서권 제6신라본기 제6문무왕 즉위년(661)조의 주석참조. 註4 시조대왕 : 신라 제13대왕의 미성령사 지금이다. 『삼국사기』 권 제32 잡지 제1제사지에 따르면 제36대 에공왕대에 종묘 5묘를 정하면서 미성왕을 김씨 시조로 불후지종으로 했다. 註5 명덕대왕(明德大王): 전 성왕의 아버지입니다. 본서에는, 원성왕 원년(785) 2월의 추봉 기사로 확인되는 관 등 이치요시 쇼 이외에는 정보가 없다. 『삼국유사』 제2권 제2 원성대왕조에, 원성왕이 아버지의 대각 간효에서 신라 조종에 전해지는 만파식호를 전해져, 왕위에 오를 수 있었다고 하는 전승이 남아 있다. 6 전성대왕 : 신라 제38대왕으로 재위기간은 년이다. 본서권 제10신라본기 제10원성왕 즉위년(785)조의 원성왕에 대한 주석 참조. 註7 혜충대왕(惠忠大王) : 신라 제38대 원성왕의 장남 김인겸(金仁謙)이다. 본서권제10 신라본기 제10 원성왕 원년(785) 2월조기사의 「인겸」에 대한 주석 참조. 註8 소성대왕 : 신라 제39대왕으로 재위기간은 년이다. 본서권 제10신라본기 제10소성왕 즉위연조의 「소성왕」에 대한 주석 참조. 註9

 

고묘 : 유교의 예(영제)로 왕실 조상의 신위를 모시고 제사하는 종묘에 배향하는 조상의 숫자를 다섯 개로 한정한 제도 혹은 그 종묘 자체를 의미한다. 본서권 제10신라본기 제10원성왕 원년(785) 2월조의 주석 참조. 註10 병부령(병부령): 병부의 장관직이다. 본서권 제4신라본기 제4진흥왕 2년(541) 3월조의 주석참조. 註11 히코 승 : 신라 제41대 헌정왕의 본명이다. 본서권 제10신라본기 제10헌덕왕 즉위년(809)조의 “헌덕왕”에 대한 주석 참조. 註12 고룡성: 신라의 왕실과 궁정 관련 사무를 담당한 이른바 내정관부 중 하나로 왕의 행차 관련 업무를 담당했다. 내정관부를 총괄한 것은 내성이었지만, 어룡성은 내성과 마찬가지로 성이라는 관부명을 가지는 한편, 장관직도 사신과 같았다. 이것은 어룡성이 내성에 예속되는 것이 아니라 병렬 관부임을 나타낸다. 어룡성의 장관직인 사신은 801년(애장왕 2)에 설치됐다. 하지만 차관직의 고백석은 이보다 앞선 경덕왕 9년(750)에 이름을 고쳤다는 기록이 있어 어룡성 자체는 이전부터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사신의 설치 이전에는 오베란이 장관이었을 것이기 때문에 관부의 위상은 내성보다 낮을 뿐이었다. 결국, 801년에 이르러, 어룡성은 내성과 같은 급의 관부에서 격상되었다고 할 수 있다. 본서권 제39지 제8직관중의 기재 순서를 고려하면, 어룡성은 34의 하부관부를 총괄·지휘한 것으로 추정된다. 어룡성의 산하에는 왕을 종석하고 사위를 전담하는 등 문황을 관할한 관부였던 세택과 도서관리 및 왕과 태자에 대한 교수를 담당했다고 하는 숭문대가 소속되어 있었지만, 이것은 류용성. 그 밖에 제사관련 업무를 담당했다고 생각되는 고전감전제전 등과 내정관부의 급여를 관리했다고 하는 조전, 그리고 왕실의 물품공급 및 보관을 담당한 일련의 관우가 소속되어 있어 내성의 핵심적 기능 중 하나이다. 내성의 역할을 나누어 담당하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참고 문헌> 미이케 켄이치 1971·1972 “신라 목정관 제고·” 『조선학보』 61·62 조선학회 이인철 1993 신라 정치 제도 사협 이치시사 홍승우 2016 왕실의 경제기반 신라의 산업과 문화(신라천년의 역사와 문화연구총서 10) 경상북도문화재연구원 註13 사신 : 신라의 왕실과 궁정 관련 사무를 총괄한 內성과 어룡성의 장관직이다. 내성사신에 대해서는 본서권 제4신라본기 제4진평왕 44년(622)2월조의 해당 주석을 참조. 어룡성 사신은 애장왕 2년(801) 2월 김히승, 곧바로 헌정왕을 임명해 처음 설치됐다. 애기왕이 13세의 젊은 나이에 즉위하고 그 삼촌이었던 김온순이 섭정을 했지만 그는 이미 병부령의 관직을 가졌다. 그가 결국 애자왕을 시해하고 왕위에 오른 점을 감안하면 당시 최고 권력자였다고 봐도 무리는 없을 것이다. 김온승이 섭정을 하면서 어룡성 사신이 됐지만 어룡성 사신이라는 관직을 통해 왕실 관련 업무도 장악해 애장왕의 왕권을 제약하려는 목적이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김온순이 이 목적으로 어룡성 사신관직을 설치했기 때문에 어룡성은 내성과 대등한 급의 관부로 격상되어 내성의 역할을 상당히 분점하게 되었다고 생각된다. <참고 문헌> 미이케 켄이치 1971·1972 “신라 목정관 제고·” 『조선학보』 61·62 조선학회 이인철 1993 신라 정치 제도 사협 이치시사 홍승우 2016 왕실의 경제기반 신라의 산업과 문화(신라천년의 역사와 문화연구총서 10) 경상북도문화재연구원 註14 상대 등 : 신라 최고관직으로 국정을 총괄했다. 본서권 제4신라본기 제4법흥왕 18년(531) 4월조의 「상대등」에 대한 주석 참조. 註15 크게 사면했다 : 원문은 대사인데 대사는 기본적으로 사와 같지만, 특정 지역에 시행된 사면인 곡사의 상대적인 의미로 전국에 시행하는 사의 의미로도 사용된다. ◉ 일어날 일식이 나타나지 않는다(8(소리))

 

2년(801) 여름 5월 첫날 임술일(일계일)에 일식이 없어야 했다. 註1 일식…없었다: 일식에 관한 전반적인 내용은 본서권 제1신라본기 제1혁가세가서간 4년(B.C.54) 4월조의 주석 참조. 『구당서』와 『신당서』의 본기 및 천문지에는 일식 관측이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이 기사에서 일식이 일어나야 하는데 일어나지 않았다고 기록하고 있어 주목된다. 이는 이 기사가 중국 사서의 기록을 그대로 옮긴 것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해주기 때문이다. 신라에서 독자적인 천문 관측으로 일식을 예상했지만 이 일식이 당시 한반도에서 관측하기 어려운 약한 일식이기 때문에 관측되지 않았다고 추정된다. 그러나 당시 신라에서 충분히 관측할 수 있는 일식이었기 때문에 신라가 저식분 일식을 관측하는데 어려움이 있었을 가능성도 상정할 수 있다(김일권 2016 ‘삼국사기’ 일식기록의 한중사료대조와 일식상황 비교’ ‘신라사 보’ 30). ◉ 형행이 달에 들어가 별이 쏟아져 기묘한 새들이 진상된다(8(소리)) 2년(801) 가을 9월에 유혹주 1이 달에 들어가 별이 비처럼 쏟아졌다. 다케진슈 주 2에서 붉은 까마귀를 바쳤다. 우두주주 3에서 흰 꿩을 바쳤다. 註1 형혹(熒惑): 화성(화성)이다.辰星 수성 태백 금성 금성 목성 목성 토성과 5 별을 이룬다. 註2 무진주: 신라광역지방행정단위로 이른바 9주일 중 하나다. 경덕왕 16년(757) 12월 무주로 개명되었다. 주지는 지금 광주광역시 일대이다. 본서권 제8신라본기 제8신문왕 6년(686) 2월조와 권 제9신라본기 제9경덕왕 16년(757) 12월조의 주석 참조. 註3 우두주: 소수주나 목청주라고도 불렸다. 신라광역지방행정단위로 이른바 9주일 중 하나다. 경덕왕 16년(757) 12월에 슈슈로 개명되었다. 주지는 지금 강원도 춘천시이다. 본서권 제5신라본기 제5태종무열왕 2년(655) 10월조와 권 제9신라본기 제9경덕왕 16년(757) 12월조의 주석 참조.

 

◉날이 너무 춥고 타무라국가 아침 하늘을 보낸다(8(소리)) 2년(801) 겨울 10월에 매우 추워 소나무와 대나무가 모두 죽었다. 耽羅国註1에서 사신을 보내 조공했다. 註1 耽羅國:현 제주도에 있던 고대 소국이다. 본서권 제6신라본기 제6문무왕2년(662)2월조의 주석참조. ◉진구에 친하다(8(소리)) 3년(802) 봄 정월에 왕이 친신신궁 1에 제사했다. 註1 신궁 : 신라에 설치된 국가적 제사 시설 중 하나로, 일반적으로 왕실 조선사당의 성격이 있었다고 본 분이다. 본서권 제3 신라본기 제3소지 말립간 9년(487) 2월조의 「신궁」에 대한 주석 참조. ◉ 김주월의 딸을 후궁에 넣는다(8(소리)) 3년(802)여름 4월에 아쇼1 김주우주2의 딸을 후궁에 넣었다. 註1 아쇼 : 신라 경위 17관 등 중 제6등에 해당한다. 본서권 제1신라본기 제1유리이사금 9년(32)조의 「아찬」에 대한 주석 참조. 註2 김주원(김주원) : 이 기사에만 나오는 인물이다. ◉ 지진이 일어난다(8(소리)) 3년(802) 가을 7월에 지진이 있었다. ◉가야산 해인사를 세우고, 갈양주가 붉은 까마귀를 바친다(8(소리)) 3년(802) 8월에 가야산주1해인사주2를 창건했다. 양양주주 3에서 붉은 까마귀를 바쳤다. 註1 가야산: 지금 경상남도 도천군 카야면과 경상북도 성주군 가천면과 수륜면에 걸친 산이다. 현재는 한자를 가야산이라고 쓰고 있다. 註2 해인사: 현재 경상남도 도천군 가야면에 있는 사원에서 사적 제504호로 지정되어 있다. 의상이 일으킨 화능종 10패 중 하나이며, 현재 국보 제32호이며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된 합천해인사 팔만대 藏經板을 보관하고 있는 것으로 유명하다. 의상 제자 상원에 배우고 당으로 유학이 융순으로 수학하고 귀국해 8세기 중엽황엄을 대표하는 스님으로 활동한 진호의 제자 순순이 가야산에서 정진하면서 해인사 창건을 시작했다. 그러자 성목 태후가 불사를 돕기 위해 전지 2500결을 하사했다. 순응이 갑자기 죽자 이정이 뒤를 이어 완성됐다. 사원의 학풍은 기존의 의상 계통의 화엄사상을 계승하면서도 이 시기를 전후하여 신라사회에 들어가기 시작하는 왕사상에 대해 융합적인 태도를 취했다. 왕실의 후원하에 광대한 토지를 소유하고, 마성 여왕대 이후 격동기에는 사원 소속의 인명과 재산을 지키기 위해 독자적으로 승군을 조직했다. 신라 말에는 화엄종단의 중심도량이며 신라가 후삼국으로 분열하자 스님들도 그 정치적 입장의 차이에 따라 고려태조왕건을 지지하는 희명중심의 북악파와 후백옥 중심의 남악파로 분열했다. 고려가 후삼국 통일을 달성한 뒤 자신을 지지한 기쁨의 해인사를 후원하고 고려시대에도 여전히 불교계의 중심사찰로 그 기능을 수행했다(최원식 1985 ‘신라하대의 해인사와 화효종’ ‘한국사연구’ 49). 최지원(최치원)이 말년에 숨긴 곳으로도 유명하다.

 

註3 양양주 : 신라광역지방행정단위로 이른바 9주간의 하나이다. 경덕왕 16년(757) 12월 양주로 개명되었다. 주지는 지금 경상남도 양산시이다. 본서권 제8신라본기 제8신문왕 7년(687) 아키조와 권 제9신라본기 제9경덕왕 16년(757) 12월조의 주석 참조. ◉균정을 왜 질에 보내려고 했지만 거절한다(8(소리)) 3년(802) 겨울 12월에 균정주 1에 오아미 2관 등을 주고, 요왕자로 해 왜국주 3에 질에 보내려고 했지만, 註1 균정 : 제38대 원성왕의 세 번째 아들 김예영의 아들로 김헌정의 동생이다. 김균종의 배우자는 기록상 두 사람이 확인된다. 우선 그의 큰 아들의 김유정, 곧 제45대 신무왕의 어머니인 박씨 부인이 본서권 제10신라본기 제10신무왕 즉위년(839)조에 나선다. 삼국유사의 왕력에는 두 번째 문자가 없어져 정▨부인이라고 쓰여 있다. 본서 기사를 고려하면 누락된 문자가 교일 가능성도 있다. 신무왕 모친의 아버지에 관한 정보는 없다. 두 번째 배우자는 역시 아들로 왕위에 오른 제47대 헌안왕의 어머니의 조명부인이다. 그는 이 기사에서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내는데 대아관관 등을 수여한 뒤 왜 질로 파견하려고 했는지를 보았을 때 아직 중앙정계에서 본격적인 활동을 하지 않았고 애장왕(大蔵王)대를 통해 특별한 행보를 확인할 수 없다. 김균종은 헌덕왕 4년(812) 봄에 사무라이로 임명돼 중앙정치 무대에 이름을 드러냈다. 812년은 헌덕왕 정권이 안정적으로 정착하기 시작한 시점에서 그가 헌덕왕과 가까운 관계였음을 추측한다. 헌덕왕 6년(814) 8월 김헌창이 후임으로 임명되어 시중직에서 물러났지만 그 후 그의 관력은 확인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가 흥덕왕 10년(835)에 상대 등에 오를 때까지 아무 직무를 맡지 않았다고 보는 것은 어려울 것이다. 어쨌든 그는 최고관직의 상대 등에 취임할 정도의 정치적 지위가 큰 인물이었다.

 

註2 양양주 : 신라광역지방행정단위로 이른바 9주간의 하나이다. 경덕왕 16년(757) 12월 양주로 개명되었다. 주지는 지금 경상남도 양산시이다. 본서권 제8신라본기 제8신문왕 7년(687) 아키조와 권 제9신라본기 제9경덕왕 16년(757) 12월조의 주석 참조. 註3 임해전: 신라왕궁인 월성 속에 있던 전각이다. 『신증동국 여지 승람(新增東国虿地勝覽)』권 21 경상도 경주부 고적조에 雁鴨池이라는 연못이 있고, 그 서쪽에 임해전자취가 있다는 기록이 전해진다. 『도쿄 잡기』에도 거의 같은 내용이 수록되어 있지만, 아이 자오 5년(804)에 임해전을 중수했다는 기록이 추가되고 있다. 후대의 기록이며 신중한 일이지만, 이것을 고려하면, 현재, 사적 제18호 신라 동궁과 월지 유적의 서쪽 건물지가 임해전 자취일 가능성이 적지 않다(전덕재 2018 “신라 동궁의 변화와 임해전의 성격” “한국과 동아시아 동궁 연구” 역사 산책 5) 註4 히가시노미야 만수반(히가시노미야 만주방) : 이름을 보면 신라 동궁에 있던 건물이나 기구로 추정되지만, 위치와 성격을 모른다. 註5 우두주: 소수주나 목청주라고도 불렸다. 신라광역지방행정단위로 이른바 9주일 중 하나다. 경덕왕 16년(757) 12월에 슈슈로 개명되었다. 주지는 지금 강원도 춘천시이다. 본서권 제5신라본기 제5태종무열왕 2년(655) 10월조와 권 제9신라본기 제9경덕왕 16년(757) 12월조의 주석 참조. 6 남산현(난산현): 본서권 제35지 제4의 지리2 장식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남산현은 함경남도 안변군 신고산면 용지원리(북한 강원도 고산군 용지원리)로 비정할 견해가 있다(정구복 외 2012 『(개정증보)역주삼국사기4』한국학중앙연구원 출판부 289페이지).

 

註7 구마가와주 : 신라의 광역지방행정단위로 이른바 9주간의 하나이다. 주지는 지금의 충청남도 공주시이다. 본서권 제8신라본기 제8신문왕 6년(686) 2월조의 주석 참조. 註8 서대현(소대현) : 본서권 제36지 제5지리 3 신라웅주 부성군 조에 나오는 부성군의 3가지 영현 중 하나인 서태현(소태현)과 같으며 현재 충청남도 진산시 팔봉면 외 32132 또한 고려충열왕이 서태현을 지태안군사로 승격시킨 것을 고려하여 충청남도 태안군 태안읍에 비정정되기도 한다(이병도역주 243쪽). <참고 문헌> 이병도역주 1996 삼국사기 을유문화사 정구복 외 2012 (개정증보) 번역주삼국사기4 한국학중앙연구원 출판부 註9 부포 : 현재 충청남도 태안군 근흥면에 있는 우라구치로 추정할 견해가 있지만(이노우에 히데오 譯註1980『삼국사기1』평범사 329페이지) 확인할 수 없다. ◉망덕사의 두 탑이 싸운다(8(소리)) 5년(804) 9월에 망덕사주 1의 2탑이 싸웠다. 註1 망덕사: 본서권 제8신라본기 제8신문왕 5년(685) 4월조의 「요덕사」의 주석을 참조. ◉ 대왕후와 왕후를 책봉한다(8(소리)) 6년(805) 봄 정월에 어머니 김씨주1을 대왕후에, 왕비박씨주2를 왕후에 봉인했다. 註1 어머니 김씨 : 대아황 김수면(김숙명)의 딸인 가츠라 부인. 본서권 제10신라본기 제10애장왕 6년(806)조에 당으로 대비해 책봉했다. 이때 계화부인을 숙씨라고 했지만 원성왕비인 성목태프의 성을 아버지 이름의 첫 글자 신이라고 적은 것과 마찬가지로 아버지의 숙명의 첫 글자를 성으로 기재한 것이다. 이를 당시 왕실의 근친혼 사실을 당에게 알리고 싶지 않았던 신라가 당에게 잘못된 정보를 알렸기 때문이라고 보고 있다(이병도 번역주 1996 삼국사기를 유문화회사 257쪽). 『구당서』권 199상 열전 149상 동이열전 신라전 『신당서』 권 220 열전 145 동이열전 신라전 등에서도 마찬가지로 나온다. 한편, 본부 모토키 권 965 외신부 봉책 3봉이 전 21년(805) 3월에는 와씨라고 나오지만, 꽃은 야도의 저주로 여겨진다.

 

註2 왕비박씨:애기왕의 왕비의 기록은 전하지 않고, 그 가계 등에 대해서는 모른다. ◉당 순종이 애장왕과 대비 및 왕비를 책봉한다(805년) 올해(805) 당당종주 1이 죽기 때문에 순종주 2가 병부 이루나카 3 겸 어부 오부 4원계 방주 5를 보내 상을 알렸다. 또, 왕을 개부의 개부 의동 삼사주 6조교 태위주 7 사지절 대도 독계림 주제 군사 13의 13세의 손자로, 곧 어머니의 성은 김씨다. 아버지의 이름으로 스크씨라고 말했지만 잘못됐다. 아내 박씨 註14를 비로 했다. 註1 도쿠무네: 당의 제12대 황제로, 이름은 이후이며, 재위기간은 년이다. 조조조 제도를 폐지하고 양세법을 시행하는 재정 확충을 도모했지만, 지방 절사의 반란이 이어지자 그들의 자립을 인정하고 당말 번진 체제가 나타나게 되는 계기를 만들었다. 註2 순종 : 당나라의 13대 황제로 무종의 장남으로 779년에 굵게 책봉되어 이때 덕종이 사망하자 제위에 올랐다. 그는 신병으로 1년도 아직 정도에 있지 않았지만, 지방군벌과 환관의 발호를 억제하려는 개혁의도를 실천하려고 했다. 註3 병부낭중:당의 관명으로, 봉서병부의 관직이다. 당육전에 따르면 정원은 2명으로 관품은 세로 5품상이다. 낭 중 1명은 무관의 훈급[훈]과 봉록[상] 및 품계[품명]을 심사하고, 29등급의 무산층을 품품하는 것을 담당한다. 다른 1명은 병적부를 관장하고, 파견해야 할 군인과 병장기의 명적을 총괄했다. 註4 미사오오:당의 관명으로 미사대의 장관직이다. 당육전에 따르면 정원 1명에게 관품이 종 3품이다. 어부대부는 국가의 형법·전장의 정령을 관할하고 관인들의 기강을 숙정하는 역할을 맡았다(김태민주편 2005 『譯蔻唐六典中』신서원 페이지).

 

註5 원계방 : 당나라 허난인으로 유교경전에 밝게 천거되어 초언위에 나와 전중 사무라이 역사가 되었다. 당정종 정원에 택지원 외승(도지원 외석)을 거쳐 김부(金部)와 선부(膳部) 낭중을 맡아 직책을 잘 수행한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때 효부로 나카가네 미시오오의 관직을 가지고 신라에게 본 봉사로 왔다. 신라에게 사신으로 오는 이유는 순종을 돕고 개혁정치를 주도하고 있던 왕이문의 배척을 받았기 때문이라고도 한다. 원게방이 신라에 들어간 뒤 당의 순종이 기분구문진에 의해 폐위되어 헌종이 옹립되는 등 당이 혼란했지만 이를 변명으로 신라가 원방방을 돌려주지 않고 억류했다고 한다. 이에 원게방은 문을 걸고 잠그고 음식물을 부러뜨린 채 항의하자 신라가 결국 돌려줬다. 6 개부의동3사 : 개부의동 3사는 삼사, 곧 사도사마사공처럼 스스로 관할을 설치하고 속관을 놓는 개부를 할 수 있는 최고 직위를 의미하는 관명으로 후한대부터 사용됐다. 여기에서는 당의 29등급 문산계 중에서 가장 높은 종 1품 관계로 사용됐다(김태민주편 2003 『 譯蔻唐六典上』 신서원 페이지). 註7 검교태위 : 당으로 태위는 삼공의 하나로 정일품이며, 그 지위는 상서도성 위에 있었지만, 증관인지 친왕이 배수되는 예가 많았고, 단지 이름만의 명예직에 가까웠다. 또한 당에서 검교는 범관으로 사용된 것이다. 註8 사지절 대도독 陞林州 제군사 : 절은 절절 또는 절월을 의미하지만 황제가 관원에게 군정과 같은 권한을 대행할 권한을 수여할 때 ​​부여하는 신표이다. 지절은 이 절을 가지고 군 지휘권을 가졌다는 의미가 되어 사지절은 여러 주 군사를 관할할 권한을 가진 일반 지절보다 높은 권한을 보유했다는 뜻이다. 따라서 사사절 대도 독계림 주제군사는 당이 신라에 관념으로 설정한 계림대도 독부의 장관으로서 모든 군사를 총괄할 권한을 가진 관직명이다.

 

註9 계림주 자사 : 당이 신라에 관념적으로 설정한 지방행정단위 계림주의 장관직이다. 註10 지절충령해군사: 절은 절절 또는 절월을 의미하지만 황제가 관원에게 군정과 같은 권한을 대행할 권한을 수여할 때 ​​부여하는 신표이다. 지절은 이 절을 가지고 군 지휘권을 가졌다는 의미가 되어, 수군에 대한 지휘권을 가진 관직명이라고 할 수 있다. 註11 상주국 : 당에서 관인에게 준 훈관 등급 중 가장 높은 12전에 해당하는 것이다. 정 2품에 비견된다(김태민주편 2003 『譯蔻唐六典上』신서원 238페이지). 註12 어머니 숙씨: 오아칸 김숙명의 딸인 가쓰라카 부인이다. 이 기사에서 계화부인을 숙씨로 했지만 원성왕비인 성목태프의 성을 아버지 이름의 첫 글자 신이라고 적은 것과 마찬가지로 아버지의 숙명의 첫 글자를 성으로 기재한 것이다. 이를 당시 왕실의 근친혼 사실을 당에게 알리고 싶지 않았던 신라가 당에게 잘못된 정보를 알렸기 때문이라고 보고 있다(이병도 번역주 1996 삼국사기를 유문화회사 257쪽). 『구당서』권 199상 열전 149상 동이열전 신라전 『신당서』 권 220 열전 145 동이열전 신라전 등에서도 마찬가지로 나온다. 한편, 본부 모토키 권 965 외신부 봉책 3봉이 전 21년(805) 3월에는 와씨라고 나오지만, 꽃은 야도의 저주로 여겨진다. 註13 나물왕(나무왕): 신라 제17대왕으로 재위기간은 년이다. 본서권 제3신라본기 제3허브이사금 즉위년(356)조의 “허브이사금”에 대한 주석 참조. 註14 아내 박씨:애기왕의 왕비의 기록은 전하지 않고, 그 가계 등에 대해서는 모른다. ◉ 공식 20여조를 배포한다(8(소리)) 6년(805) 가을 8월에 공식 주1 20여조를 전시했다. 註1 공식(공식): 애장왕 6년(805)에 반시된 공식(공식)의 성격에 대해 이것을 공문서 서식을 규정한 공식령으로 보는 입장(다케다 유키오 68페이지; 다봉 德 263페이지; 하야시 노부아키 161페이지)이 있다(이노우에 히데오 페이지); 어쨌든 신라하 대율령이 당률령의 영향하에서 율령격식 형식을 갖추었다고 할 수 있다. 공식 내용에 대해서는 한때 같은 해에 위와부와 사원 신전장차 관직의 이름을 바꿨다는 기록이 있다는 것을 근거로 관직 개칭에 관한 규정이 포함되었을 것이라는 추정이 제기된 바 있다(이기동 페이지). 이것을 공식령으로 보는 입장은 공문서 서식을 내용으로 상정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보다 구체적으로는 고려사 권 84지 제38형법 1의 공식과 같이 관인이나 공무처리에 관련된 규정이라는 주장도 있다(홍승불 쪽).

 

註3 헌종 : 당의 제14대 황제로 이름은 이순이었고 순종의 일곱 번째 아들로 805년 굵게 책봉되어 같은 해 8월 선위를 받아 제단에 올랐다. 재위기간은 년 만에 관료조직을 개혁해 강회의 재부를 마련하면서 월권과 반란을 제압하려 했다. 이에 반진의 발호도 서서히 자주 들어와 황제권이 어느 정도 회복했다. 그러나 만년에 김탄을 먹고 조급증에 빠져 결국 첸히로시 등에 시해됐다. 註4 김헌충 : 이 기사에만 나오는 인물로 왕자로 되어 있지만, 그 가계와 행적을 알 수 없다. 註5 시비서감:당의 관명으로 비서감은 비서성의 장관으로, 종 3품관직이다. 비서감은 나라의 경전 및 도서에 관한 일을 관할하고, 산하에 있는 저작국(저작국)과 태사국 2국을 통했다(김태민주편 2005 『譯蔻唐六典上』신서원 148페이지). 전에 시험이 붙어 임시·명예직이었던 것 같다. ◉사신을 당에 보내 조공한다(8(소리)) 7년(806) 가을 8월에 사신을 당으로 보내고 아침 하늘했다. 註1 당에… 조공했다: 『본부 원귀』 권 972 외신부 17 조공 5 원화 1년(806) 8월 아침에도 신라의 사신 파견이 기록되고 있다. ◉ 김홍찬을 시중으로 한다(8(소리)) 8년(807) 봄 정월에 이창(소1) 김헌창주2 <창을 정으로 한 적도 있다.註3>을 시중註4로 했다. 註1 이창 : 신라경위 17관 등 중 제2등에 해당한다. 본서권 제1신라본기 제1유리이사금 9년(32)조의 이추찬에 대한 주석 참조. 註2 김헌창 : 태종무열왕계에서 전성왕과의 왕위경쟁으로 밀려 명주군왕이 된 김주원의 아들로 김종기의 동생이다. 아버지가 중앙에서 밀린 뒤에도 형과 함께 중앙정계에서 활동한 것이 확인되지만, 이것은 원성왕계가 태종무열왕계를 포섭하기 위한 방편으로 이해되고 있다. 이때 사무라이를 맡아 어느 정도의 정치적 지위를 갖고 있던 것처럼 보이지만 이후 헌덕왕 5년(813) 1월에 무진주 도독이 됐다. 주장관직이 상급관직이지만 중앙정계에서 밀려나기 시작했다고 추정할 수 있다. 다만 다음해 8월에 다시 중앙으로 복귀해 시중이 된 것을 볼 때 완전히 밀려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헌덕왕 8년(816) 1월 다시 청주 도독이 되어 지방관으로 내려가게 되었고 이후 헌덕왕 13년(821) 4월에는 구주 덕덕에 자리를 옮기면서 중앙에서 활동할 수 없게 됐다. 김홍찬이 헌덕왕 즉위 이후 다시 시중이 된 것을 보면 그가 헌덕왕의 정변에 협력해 정권에 참여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헌덕왕과 그 동생들 곧 원성왕의 장남인 겸계가 권력을 독점하려 했다. 인겸계의 권력 독점 의도에 반발한 그는 헌덕왕 14년(822) 3월 자신이 장관이었던 구마가와주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그의 반란은 기본적으로 왕위쟁 탈전의 성격을 가진다고 할 수 있지만, 신라골품제 사회에서 소외된 지방을 거점으로 새로운 국가 건설을 표방했다는 점에서 신라하대 지방의 성장을 반영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의 반란은 성공하지 못했고, 인겸계 김충공과 원성완 3남 예영계 김균정 등이 중심이 된 토벌군으로 진압돼 최후를 맞았다. 그러나 김헌창의 어려움을 계기로 신라하대의 분열과 대립면은 촉진되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정원: 당 제12대 황제덕종 때의 연호로, 7부터 8까지 21년간 사용되었다. 註4 김준온(김준영) : 신라 제39대 소성왕의 본명이다. 본서권 제10신라본기 제10소성왕 즉위년(799)조의 「소성왕」에 대한 주석 참조. 註5 신라왕:본서 권제10 신라본기 제10 애장왕 즉위년(800)조 기사에 의하면, 개부의동삼사검교 태위신라왕으로서 책봉했다. 6 어머니 신씨 : 아이 자오의 어머니의 소성왕비다. 본서권 제10신라본기 제10소성왕 즉위년(799)조에는 김씨로 했다. 삼국유사 왕조에 성호태후라고 했지만 본서권 제10신라본기 제10소성왕 원년(799) 8월조에 해당 시호에 추봉됐다. 한편 이 기사와 장당서 권 199상, 열전 149상, 동이열전 신라전 신당서 권 220 열전 145, 동이열전 신라전 등에서 소성왕의 어머니를 신씨라고 말하는 것이 확인된다. 이 기사에 걸린 찬사의 주석에서는, 소성왕의 어머니는 김신술의 딸이지만, 아버지의 이름의 최초의 문자를 성별로 일어난 착오로 했다. 이러한 오류는 왕실의 근친혼 사실을 당에 숨기고 싶은 신라의 의도 때문에 나타난 것으로 보고 있다(이병도 번역주 1996 삼국사기를 유유문화사 258페이지). 그런데 김신슬의 딸은 원성왕비로 소성왕의 할머니이며 어머니가 아니다. 이 기사에서 왕의 어머니를 신씨로 한 것은 당이 소성왕대에 전왕 원성왕의 왕비를 태비로 책봉하면서 나온 내용이므로 당시 신라가 당에게 가족관계를 잘못 알렸기 때문에 일어난 에러가 아니다. 註7 아내의 숙씨:소성왕비의 가츠라 부인이다. 대아황의 김숙명의 딸로 애장왕의 어머니다. 본서권 제10신라본기 제10애장왕 6년(806)조에 당으로 대비해 책봉했다. 이때 효화부인을 숙씨라고 했지만 원성왕비인 성목태프의 성을 아버지 이름의 첫 글자 신이라고 적은 것과 마찬가지로 아버지 숙명의 첫 글자를 성으로 기재한 것이다. 이는 당시 왕실의 근친혼 사실을 당에게 알리고 싶지 않았던 신라가 당에게 잘못된 정보를 알렸기 때문이라고 보고 있다(이병도 번역주 1996 삼국사기를 유문화사 257페이지). 『구당서』권 199상 열전 149상 동이열전 신라전 『신당서』 권 220 열전 145 동이열전 신라전 등에서도 마찬가지로 나온다. 한편, 본부 모토키 권 965 외신부 봉책 3봉이 전 21년(805) 3월에는 와씨라고 나오지만, 꽃은 야도의 저주로 여겨진다.

 

註8 단탄:『신당서』 권197 열전122 메이징과에 급제해 지방관과 전중 사무라이 사사의 사인 등을 역임하고, 사봉로 나카가네 미사 중승으로서 신라 소성왕의 본봉사의 임무를 맡았다. 이때 그는 자신에게 할당된 관직을 팔아 얻은 재물로 개인의 활동경비를 조달하던 기존의 관행을 거부하고 필요한 경비를 조정에 청구해 집행했다고 한다. 하지만 신라에 오는 도중에 소성왕이 사망했다는 소식을 듣고 본봉서를 가지고 돌아갔다. 그 후 다양한 관직을 거쳐 좋은 관리로 이름을 남기고 58세에 사망했다. 註9 庭(貞元)…捨てて:同じ内容が『舊唐書』巻199賞 熱戦149賞)』 巻95 新羅殿 『自治通感』 巻235 当期51 定員 16年(800) 4月組 『冊府元龜』 巻965 外信部 封臣(封冊)3 定員(貞元) 16年(80) 註10 중서성 : 당의 재상관부 삼성의 하나이다. 당육전에 따르면 중서성의 장관, 중서령은 군국의 정령을 관장하여 황제의 사업을 밝혀 천인을 조화시킨다. 들어가서는 이 일을 불쌍하게 나와서는 이 일을 받아들여 가서 만방을 다스리고 온갖 정무를 살리면, 통상 천자를 돕고 다이쇼를 집행하는 자로 했다(김태민 주편 2005 『 譯蔻唐六典中』 신서원 94페이지). 왕명문서를 작성하기로 했지만, 그 하나가 본서이다. 소성왕에 내리는 책이 중서성에 있는 것도 그 때문이다. 註11 코코지: 당의 특별 사무관부 9시 중 하나이다. 당육전에 따르면 장관경의 직장은 빈객(賓客) 및 흉련에 관한 의전의 일을 관할하는 것이었다. 즉, 외교 사명의 접대를 담당했다(김태민주편 2005 『譯蔻唐六典中』신서원 페이지).

 

註12 히코 승 : 신라 제41대 헌정왕의 본명이다. 본서권 제10신라본기 제10헌덕왕 즉위년(809)조의 “헌덕왕”에 대한 주석 참조. 註13 중공 : 다른 기록에서는 같은 한자의 이름을 확인할 수 없는 인물이다. 그러나 한자의 발음이 비슷하고 헌덕왕의 김희승 동생에서 상당한 정치적 지위를 가지고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김충정의 이표기일 수 있다(권영오 158쪽, 이문기 63쪽). <참고 문헌> 권영오 2011 신라하대 정치사 학구 헤안 이문기 2015 신라시타 대정치와 사회연구 학연문화사 註14 문극:당·송대에 묘사(묘사)와 궁전의 문이나 부주의 공문 혹은 공신이나 고관의 집의 대문에 진열한 의장용의 창이다. 註15 김신술(김신술) : 생몰년의 미래 신라진골 귀족이다. 최고관 등각 사이를 소지하고, 원성왕의 장인이며, 핵심적인 권력자의 하나로 추정되지만, 본서에서 그의 행위가 확인되지 않는다. 다만, 에공왕대가 만들어졌다고 추정되는 사천천 후나사토 신라비의 이름이 나오고 이어 주총관소 간(소간추독)이 기록돼 있지만 당시 그의 관직과 관 등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註16 신과… 잘못되어 있다: 이 기사와 『장당서』 권 199상 열전 149상 동이열전 신라전 『신당서』 권 220 열전 145 동이열전 신라전 등으로 왕의 어머니를 신씨로 하고 있는 것이 확인되지만 본서에서. 왕의 어머니는 김신슬의 딸인데 아버지 이름의 첫 문자를 성으로 알리고 일어난 착오였다. 이러한 오류는 왕실의 근친혼 사실을 당에 숨기고 싶은 신라의 의도 때문에 일어난 것으로 보고 있다(이병도 번역주 1996 삼국사기를 유물문화사 258페이지). ◉군읍의 경계를 정한다(8(소리)) 9년(808) 12도에 사자를 보내 다양한 ​​군읍의 경계를 나누어 결정했다. ◉ 일식이 일어난다(8(소리))

 

9년(808) 가을 7월 첫날 신사일(신점일)에 일식이 있었다. 註1 辛巳日에 일식이 있었다 : 일식에 관한 전반적인 내용은 본서권 제1신라본기 제1혁가세가서간 4년(B.C.54) 4월조의 주석 참조. 이 일식의 기사는 장당서와 신당서 본기의 기사나 신당서 천문지의 기사와 같다. 구당서 천문지의 경우 일간지가 돛 똥으로 잘못 쓰여 있다. 당시 신라에서도 일식 관측이 가능했다고 한다(김일권 2016 「《삼국사기」일식기록의 한중 사료 대조와 일식 상황 비교」 『신라사 학보』37 190페이지). ◉월이 필수를 침범한다(8(소리)) 10년 봄 정월에 달이 필수주1을 침범했다. 註1 필수: 하늘의 적도를 따라 남북에 있는 별을 28개 구획으로 구분한 별자리인 28개 물 중 19개 물에 해당한다. 서양의 별자리에서는 황소자리에 해당한다. 달이 필수에 가까워지면 비가 계속 내리고 날씨가 추워진다고 했다. ◉ 서현상성 소금창고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리고 벽사에서 두꺼비가 뱀을 잡는다(8(소리)) 10년(809)여름 6월에 서형산성주1의 소금창고에서 울음소리가 나왔지만 소리가 울리는 소리와 같았다. 바지 절 2에서 두꺼비가 뱀을 잡았다. 註1 서형산성 : 경상북도 경주시 서락동 선도산에 위치한 선도산성. 본서권 제4신라본기 제4진평왕 10년(593) 7월조의 주석 참조. 註2 바지: 장소 미래의 사원. ◉ 김육진을 당으로 사신에게 보내 큰 가뭄이 들려 애장왕이 죽는다(8(소리)) 10년(809) 가을 7월에 대아창주1 김륙진(金陸珍)주2를 당에 보내 사은해 기념품을 바쳤다. 큰 소리로 말했다. 왕의 삼촌 승조 4와 동생 이창 註 5 悌邕註 6이 병사를 데리고 왕궁에 들어와 반란을 일으켜 왕을 시해했다. 왕의 제체명(體明) 註8이 왕 옆에서 지키고 함께 해를 받았다.

 

왕을 추격하고 애기로 했다. 註1 大阿湌 : 신라경위 17관 등 중 제5등에 해당한다. 본서권 제1신라본기 제1유리이사금 9년(32)조의 「대아짱」에 대한 주석 참조. 註2 김육진 : 삼국유사 권 3탑상 제4무장 사미타 전조에 의하면, 소성왕비의 계화부인이 소성왕이 돌아왔을 때, 그 생명을 기도하기 위해 아미타 불상을 만들었다고 한다. 그 일을 기록한 경주무장사지아미타 선조사적비의 비문을 왕명을 받아 찬양한 인물이다. 註3 당에… 바쳤다: 이 일은 『舊唐書』권 199상, 열전 149상, 동이열전 신라전과 『당회요』권 95신라전에도 있다. 註4 히코 승 : 신라 제41대 헌정왕의 본명이다. 본서권 제10신라본기 제10헌덕왕 즉위년(809)조의 “헌덕왕”에 대한 주석 참조. 註5 이창 : 신라경위 17관 등 중 제2등에 해당한다. 본서권 제1신라본기 제1유리이사금 9년(32)조의 이추찬에 대한 주석 참조. 6 悌邕: 이 기사에서만 보이는 인물이다. 헌덕왕의 동생으로 정변하고 주도적인 역할을 했지만 이후 일절 등장하지 않는다. 이에 타인의 이표기일 가능성이 개진되었다. 크게 김승승(김수승) 바로 흥정왕으로 보는 견해(이기동 155페이지; 최홍조 357페이지)와 김승빈(김숭장)으로 보는 견해(김창겸 188페이지)로 나뉜다. 이와 달리 이 기사를 그대로 인정하고 다른 동생으로 김재온이 있었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성석열 183쪽). <참고 문헌> 이기동 1984 『신라골품제사 회와 꽃주도』 이치시오카쿠 김창겸 2004 「신라하대의 인겸계 왕권과 김숭장」 「신라사 학보」 1 최홍조 2004 신라애기 왕대의 정치적 동동과 김히승 한국 고대 사협 34 송석열 2016 신라헌덕왕대 정치과정과 정교부인의 혼인문제 신라문화 48 註7 왕을 시해했다: 삼국유사 왕력에는 에 날짜가 구체적으로 기록되어 헌덕왕과 흥덕왕이 왕을 시해했다고 한다.

 

註8 체명(體明): 애장왕의 아울로 이때 왕을 지키고 함께 죽였다. 이 책의 다른 곳에서는 볼 수 없습니다. 그를 신당서 권 220 열전 145 동이열전 신라전에 나오는 김첨명과 같은 사람으로 간주하기도 한다(송흥호 305페이지). 한편 애장왕에게 김승명과 김채면이라는 두 형제가 있었다고 보고 있다(최홍조 359쪽). <참고 문헌> 최홍조 2004 신라애기 왕대의 정치적 동동과 김히승 한국 고대 사협 34 송훈호 2016 “9세기 전반 신라의 정치 동향과 충실한 역할” ‘한국 고대 사협’ 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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